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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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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독립운동 개요발발

    학생독립운동 개요 및 발발 내용입니다.

    ▶학생독립운동 개요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대표적인 민족운동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규모나 영향 그리고 역사적 의의에서 3․1운동과 나란히 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순히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의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책과 1929年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 1920년대 이후 노동․농민․학생운동의 성장 등 국내외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일어난 것이었다.

    1929년 11월 3일은 日王 明治의 탄생기념일인 明治節이었으나, 또한 우리에게는 음력 10월 3일 국조 단군이 개국하신 날이었다. 우리의 開天節에 일제의 神社에 참배를 강요당했던 광주고보생들의 비통한 심경에 가해졌던 일본 학생들의 무례한 도전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에서의 항일시위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지역에 그치지 않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시위나 동맹휴학 등의 형태로 계속되어 전국적으로 194개 학교가 참가하였고 참가 학생 수는 54,000여 명으로 당시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던 것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희생당한 학생 수는 퇴학 582명, 무기정학 2,330명, 검거 당한 사람이 1,462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파급되어 만주의 간도와 중국의 吉林省, 上海, 北京, 그리고 일본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격려하는 집회와 만세시위가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들의 항일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으나 新幹會․槿友會․朝鮮靑年同盟등 당시의 주요 사회단체와 醒進會․讀書會中央本部․朝鮮學生前衛同盟 등 비밀결사의 지원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은 끊임없이 이어져 1940년대 전쟁에 따른 강압적 징병과 공출에 대한 저항운동이 드디어 1943년 5월 광주고보 동맹휴학을 계기로 제2차 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였다.
    이렇듯 정의감과 애국심이 강렬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고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자랑스러운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학생독립운동 배경


    1. 사회경제적 배경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와 나주사이를 통학하던 한․일 학생간의 사소한 충돌에서 비롯되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그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성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1920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조선 병합 이후, 일제는 토지 조합 사업을 통해 식민지 수탈구조와 안정적인 재정수입원을 확보하고 한편으로는 헌병 경찰 제도를 바탕으로 무단정치를 시행하여 폭압적으로 우리민족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배방식은 곧바로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저항에 부딪혀 3․1운동을 초래하였으며, 3․1운동은 일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혀 통치방식을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였다

    . 문화정치는 겉으로 유화적이고 세련된 모습을 띄고 있어서 지배방식에서는 한 단계 발전적인 모습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무단정치와 다를 바가 없는 기만적인 것이었다. 일제는 1920년 회사령을 폐지하고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경제공항의 위기를 타개하면서 동시에 조선의 산업구조를 식민지적 산업구조로 재편해 나갔다. 특히 1920년부터 34년까지 시행된 산미증식계획은 소위‘쌀 소동’으로 인한 일본 본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본은 자본주의가 급증하면서 식량수급과정이 일시적으로 왜곡되어 1918년 일본 각지에서 도시노동자와 빈민들이 쌀을 요구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단기적으로는 쌀 소동을 해결하고 장기적으로는 일본자본주의 발전에 절대 필요한 저임금 유지를 위한 식량 공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시행했던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으로 자작농들은 토지를 몰수당하거나 헐값에 팔아 넘겨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그리하여 춘궁기에 먹을 쌀이 떨어져 초근목피로 연명해야만 하는 농민이 전체 농민의 절반에 가까웠으며 원시적인 생활을 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화전민과 만주․연해주 등지로 떠나는 유랑민이 급증하였다.
    이렇듯 일제의 경제침략과 수탈 속에 조선의 농촌경제는 점점 피폐해져 갔다. 당시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학생들은 이러한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과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으며 이것이 통학 열차 안에서의 일본인 학생과의 충돌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2. 정치 사상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국내적으로는 3․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저항에 부딪힌 일본제국주의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폭압적인 무단정치 대신 유화적인 문화정치를 시행하였다. 1919년 9월 새로 부임한 사이토오 미노루 총독의 시정방침에 잘 나타나 있는 문화정치의 주요한 내용은 총독에 무관뿐만 아니라 문관도 임명할 수 있게 하고 헌병 경찰 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바꾸며 일반관리와 교원들이 금테 제복을 입고 칼을 차는 것을 폐지하고 조선인의 관리 임용과 대우를 개선하며 언론․출반․집회․결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지방자치 실시를 위한 조사연수에 착수하며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운동세력을 분열시키고 더욱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기만적인 조치였다. 실제로 해방될 때까지 총독에 문관은 한 명도 임명되지 않았으며 헌병경찰제도가 폐지되었다고는 하지만 경찰관서와 경찰관은 각각 3배 이상 늘어나고 조선 주둔 일본군도 5,0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증강되는 등 무력에 의한 지배를 완화한 것이 아니었다. 문화정치는 무단정치와 그 지배의 본질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었으며 일본제국주의가 국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겉옷을 바꿔 입은 것에 불과하였다.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은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정치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성장을 이루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나주에서는 1927년 9월 신간회 나주지회가 창립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나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학생들의 대(大)시위가 처음 시작되었던 광주에서는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광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들 단체들은 자신들이 속한 지역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갔다.
    특히 광주청년동맹은 전남청년연맹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활약했던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했던 당시 전남청년연명과 각 지역의 청년동맹, 신간회 지회에 참여하거나 연관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전남청년연맹회에서도 학교를 졸업한 성진회 출신들이 많이 참여하여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신간회․근우회․조선청년총동맹 등과 연계를 맺으면서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데에서 기인했던 것이다.

    3. 학생운동의 성장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 194개교에서 54,0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거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일제시대 3대 민족운동의 하나로 일컬어져 왔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이렇게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전국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와 왜곡된 식민지 교육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학생운동의 성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3․1운동에서 표출되었던 한국인의 불만을 무마하는 방법의 하나로 조선의 교육제도를 일본의 교육제도 기준으로 동등하게 한다는 준거주의(準據主義)를 표방하며 조선인에 대한 고등교육의 기회를 늘리고 4년 이내에 전국의 모든 면(面)에 최소한 1개의 보통학교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혜택은 주로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학생에게 주어졌다. 고등교육은 극히 제한되어 있어 조선인 학생들은 항상 입학난을 겪어야 했으며 교육 내용 역시 실업교육과 일본어․ 일본역사 교육이 주가 되어 충실한 일본 황국신민(皇國臣民)을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비록 교단에서 교사들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위협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없어졌으나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항상 권위주의적으로 학생들 위에 군림하였으며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자치활동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또한 이들은 조선인 학생을 인격적으로 무시하였으며 비교육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식민지 차별교육에 대한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학생들이 민감하게 느끼고 불만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자신들을 둘러싼 식민지 사회의 사회경제적 피폐상은 이들로 하여금 단순히 교육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교육적 차별과 식민지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나아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학생단체를 조직하거나 동맹휴학 등을 감행하면서 학생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학생층은 조선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지식층들이었으며 노동자․농민 등 다른 사회계층보다 조직화되기 쉬웠기 때문에 항상 민족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일제시대 3대 민족운동이었던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학생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4. 신간회(근우회)와 조선청년총동맹 결성
    - 신문잡지종람소(1917) 강석봉(1928일본망명),한길상,최한영
    - 광주최초 사회주의 신우회조직(1923) 강석봉,강해석,지용수
    - 조선ML당 광주지부(1926) 강석봉,강해석,강영석,한길상
    - 전남청년연맹 결성(1926) 장석천,장재성,강석원,왕재일
    - 신간회 나주지회 창립(1927.9) 박준삼(박준채형),박공근
    - 나주청년동맹 결성(1927.12) 박준삼(박준채형),박공근
    - 신간회 광주지회 설립(1927.10) 장석천,강석원,국채진
    - 광주청년동맹 결성(1927.11) 장석천,국채진
    - 광주학생독립운동 제2차시위(1929.11.12) 강석원
    ※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사상적 주도 및 주역

    5. 일본제국주의 침략국의 의도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조선을 병합하고 식민지를 삼으면서 두차례(3.1운동과 6.10만세운동)의 커다란 저항을 치르고서 불과 3년이 채 안된 시기에 광주지역에서 발생한 순수한 학생들만의 걷잡을 수 없는 저항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상황을 신속하게 진화하고 사건을 간단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의도로 단순히‘나주 학생 한일간의 충돌’쯤으로 정리하고자 노력했으리라 본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가 조선을 병합(1910년)하고 정치적으로는 무단통치,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1910년~1918년)을 실행한지 10년 뒤, 문화통치라는 새로운 통치체제로의 변화 아래에서 발생한 민족운동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성진회와 독서회


    성진회 회원 결성의 날 춘원사진관에서 기념촬영했다는 사진(광주학생운동의 주역들, 최성원, 2001)에는 1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수에 대해서는 12명·15명·16명·17명 등 설이 있으나 16명이라 나오는 자료가 가장 많다. 특히 성진회 결성의 주역인 왕재일도 ‘광주고보생 9명, 광주농업교생 7명으로 성진회를 조직했다’고 회고한다.
    (성진회 창설자 왕재일씨의 회고, 동아일보 1960.11.03)

    광주 지역 학생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학생 결사 단체인 성진회(醒進會)는 1926년 11월 3일에 조직되었으나 약 5개월 만에 1927년 3월 하순 표면상 해체하였다. 1928년 6월경에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주동하다 퇴학당하거나 검거 당하여 조직이 위축되어 붕괴위기에 이르렀다.

    이후 1926년 6월 중순경에 동경에 유학했던 장재성이 학업을 중단하고 광주에 돌아와 양림리 김기권의 집에서 모여 독서회 중앙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독서회는 광주고보 외에도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광주여고보로 이어 결성되어 비밀결사운동, 동맹휴학 투쟁으로 발전되어 나아갔고 광주학생독립운동 폭발의 기저가 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2003)

    ◎ 성진회 ▶ 독서회 개편시기
    1) 1926년 : 양동주 ‘항일학생사’청파출판사(1956)
    2) 1927. 11월 : 박준채의 회고
    3) 1929. 06월 : 독서회사건 예심종결서(1930.1.29)

    ◎ 독서회 개편의 필요성
    1) 성진회의 노출로 목적수행과 활동이 어려운 현실적 상황 : 회원의 보호
    2) 성진회 목적달성을 지속하기 위한 장기투쟁적인 의미 : 각 학교 연결
    3) 광주지역 항일 민족학생의 핵심기구로 성장 : 청년총연맹, 신간회연계

    ◎ 독서회중앙본부 조직(1926.06) - 김기권, 장재성 등
    ○ 결의내용
    1) 1주 1회 회합 협의
    2) 각 학교별 독서회 조직과 연계
    3) 중앙부 존재는 비밀
    4) 소비조합 조직(김기권 문방구)
    ※ 독서회 조직 학교 : 광주고보, 광주농교, 광주사범, 광주여고보, 목포상고

    ◎ 독서회 역할
    1) 광주지역 분산적, 개인적 항일투쟁을 체계적, 통제적 배양 진전
    2) 독서회중앙부산하 각학교 독서회 조직으로 기반확대 및 항일학생층을 광범위하게 수용하여 후일 막강한 항일투쟁 전개할 수 있는 힘 구축
    3) 단순한 민족차별교육 철폐 운동에서 일보 전진 항일독립운동 성격 발전
    4) 1929년 학생운동 뿐만 아니라 1930년대 학생운동의 핵심 역할
    5) 독서회의 가장 큰 공헌 : 항일투쟁의 정신적 기반